성모 입당: 북드비나강 유역에서 온 14세기 이콘

성모 입당: 요아킴과 안나가 양파 모양 돔 세 개를 얹은 성전 앞에서 어린 마리아를 즈가리야에게 데려가고, 천사가 앉아 있는 테오토코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장면
성모 입당, 14세기. 북드비나강 유역 크리보예의 성삼위일체 성당 출처. 러시아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장면의 왼쪽 끝, 대사제 즈가리야의 뒤편이자 성전 안쪽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회색 머리에 짧은 수염을 기른 노인이 붉은 히마티온을 두르고 서 있다. 성모 입당 장면에 본래 그의 자리는 없다. 그는 약혼자 요셉이며, 러시아 미술관 소장품 목록에 따르면 그의 존재는 소장 번호 ДРЖ 2724로 그곳에 보관된 이 이콘의 유일한 특이점이다.

세 조각을 이어 붙인 소나무 판에 달걀 템페라로 그린 이 이콘은 크기가 91 × 65.5cm이며, 오늘날 아르한겔스크주에 속하는 북드비나강 유역 크리보예(Кривое)의 성삼위일체 성당에서 나왔다. 제작 시기는 14세기이다. 어디에서 그려졌는지는 아직 열린 문제로 남아 있다. 미술관은 물음표를 붙여 노브고로드 작품으로 소개하는 반면, 엥겔리나 스미르노바는 대(大)노브고로드 회화에 관한 단행본(모스크바, 1976)에서 러시아 북부의 어느 공방 쪽으로 기울었다.

북드비나강에서 러시아 미술관으로

스미르노바에 따르면 크리보예의 농촌 교구 중심지(포고스트)에 있던 바로 그 성삼위일체 성당에서 13세기 후반의 아름다운 왕문과 후대의 이콘 몇 점도 나왔다. 〈성모 입당〉은 1920년 이고리 그라바르가 이끈 교육 인민위원회 조사단이 반출하여 모스크바의 중앙 국립 복원 공방으로 옮겼다. 그곳에서는 먼저 같은 해 말에 왼쪽 위 한 부분을 시험 세척했다. 원래 회화층을 완전히 드러내는 작업은 1922년 10월부터 1923년 2월까지 I. I. 수슬로프가 마무리했고, 즈가리야와 요셉의 모습은 M. I. 튤린이 드러냈다. 판재들은 1925년에 서로 접착되었다.

이 이콘은 1927년 공방의 제3회 복원 전시회에 출품되었고, 이어 1929년부터 1932년까지 고대 러시아 회화 순회전과 함께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을 돌았다. 베를린과 쾨니히스베르크, 빈, 런던, 시카고의 전시 도록에 이 작품이 실려 있다. 귀국한 뒤에는 국영 기관 안티크바리아트를 거쳐 1933년 러시아 미술관에 들어갔다.

한 가지 의문은 이 이콘의 원래 용도에 관한 것이다. 빅토르 라자레프는 2000년에 출간된 러시아 이콘화 도록에서, 크리보예 가까이 크냐지오스트로프에 성모 입당에 봉헌된 성당이 있었다고 지적하고, 이 이콘이 그 성당의 수호 축일 이콘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 가설은 작품의 크기를 설명해 주지만, 이콘이 언제 어떻게 성삼위일체 성당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성전 안의 세 순간

이야기는 《야고보 원복음서》(7–8장)에 바탕을 둔다. 세 살 난 마리아는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의 손에 이끌려, 불 켜진 등잔을 든 처녀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간다. 사제는 아이를 맞아들여 축복하고 제단 계단 위에 앉히며, 마리아는 그곳에서 천사의 손으로 양육을 받으며 살게 된다. 크리보예의 화가는 이 순간들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 않는다. 그는 세 순간을 모두 한 지붕 아래에 배치한다.

아래 띠에서는 판의 표면과 나란한 한 줄 위에서 봉헌 장면이 펼쳐진다. 즈가리야는 하늘색 키톤 위에 붉은 망토를 걸쳤고, 길고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다. 그는 흰 점이 찍힌 세로 띠를 두르고 있는데, 이 띠는 정강이 높이에서 더 넓어지며 끝난다. 그는 한 손을 펴서 아이 쪽으로 내민다. 어두운 마포리온을 걸치고 금빛 후광을 두른 어린 마리아는 검은 아치형 개구부 바로 앞에 서 있으며, 이 개구부가 그녀의 모습을 구도의 중심에서 도드라지게 한다. 그 뒤로 검은 머리의 요아킴이 푸르스름한 키톤과 검붉은 히마티온 차림으로 한 손은 대사제 쪽으로 내밀고 다른 손은 딸의 어깨에 얹는다. 이어 청록빛 키톤 위에 진사색 마포리온을 걸친 안나가 따르고, 가장자리에는 처녀들이 빽빽이 몰려 서 있다. 스미르노바에 따르면 처녀는 다섯 명으로, 귀걸이를 하고 손에 초를 들었으며, 맨 앞의 처녀는 가는 초 하나를 뚜렷이 들고 있다.

왼쪽 위, 계단 꼭대기에서는 마리아가 이제 홀로 성전 안에 앉아 장면의 오른쪽을 향해 두 손을 펼치고 있다. 중앙 공간에서 붉은 옷에 어두운 색 날개를 단 천사가 음식을 들고 그녀를 향해 대각선으로 내려온다. 앉아 있는 테오토코스를 받치는 그 계단은 요셉과 즈가리야 바로 뒤로 아래 장면의 높이까지 이어져 내려오며, 이로써 이야기의 두 시간이 단순한 건축 요소 하나로 연결된다.

스미르노바는 이 도식이 이콘이 제작된 시기보다 오래된 유형, 곧 12세기 또는 13세기 초와 연결되는 유형을 따른다고 보았다. 주요 인물이 중앙에 있고, 처녀들의 행렬이 부모 뒤를 따르며, 대칭적이고 깊이감이 없다는 점이다. 이미 13세기 말부터 14세기 내내 비잔티움 회화는 대개 처녀들을 마리아 바로 뒤, 곧 중앙에 두고 부모를 가장자리로 밀어냈으며, 인물들은 활발하게 움직이고 키보리온이나 다른 건물들은 원근 단축법으로 표현되었다. 반면 크리보예의 이콘에서는 즈가리야가 관례대로 아이에게 몸을 숙이지도 않고, 요아킴과 안나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는다. 모두가 거의 똑같은 자세로 서서 기도하는 손짓을 되풀이하며, 행렬의 리듬은 바로 이 반복에서 생겨난다.

즈가리야 뒤의 요셉

《원복음서》(9장)에 따르면 요셉은 9년 뒤에야 등장한다. 그때 제비뽑기로 그가 정해져, 어느덧 열두 살이 된 마리아를 대사제의 손에서 넘겨받아 그녀의 동정을 지키게 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여기에 있는가? 미하일 알파토프는 화가가 마리아와 관련된 모든 인물을 그녀 앞에 모아 기도하게 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자클린 라퐁텐도소뉴(Jacqueline Lafontaine-Dosogne)는 테오토코스의 유년기 도상학에 관한 연구(브뤼셀, 1964–1965)에서 〈약혼〉 구도로부터 차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약혼〉 구도는 입당 유형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 영향을 거꾸로 되돌려 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이 인물이 또 한 명의 사제일 수 있다는 견해도 내놓았다. 스미르노바는 이 인물 곁에 요셉의 이름을 적은 명문이 있다는 점을 들어 두 번째 견해를 물리쳤다.

그의 위치는 무심히 정해진 것이 아니다. 요셉은 장면 오른쪽의 가족 곁이 아니라 성전 쪽, 바로 아이를 맞아들이는 이의 뒤에 서서 손바닥을 가슴 앞에 펴고 있다. 이 배치는 구도에 근거한 해석으로서, 장차 이루어질 인계의 사슬, 곧 부모에게서 대사제로, 그리고 훗날 대사제에게서 약혼자로 이어지는 흐름을 읽어 낼 수 있게 한다.

세 개의 돔을 얹은 성전

배경을 차지하는 것은 비잔티움 전통에서처럼 키보리온이 아니다. 그 전통에서는 성찬대 위의 닫집이 솔로몬 성전을 상징했다. 이곳의 배경은 입면과 단면을 함께 보여 주는 건물이다. 잎 모양 끝장식이 달린 초록색 아치들이 세 칸을 이루고, 이 아치들은 점무늬로 장식된 작은 기둥들과 마름모무늬가 있는 중앙의 각주(角柱)들 위에 놓인다. 아키트레이브에는 둥근 채광창이 뚫려 있고, 검은 문 위에도 두 개가 더 있다. 그 위로는 지그재그 선이 그어진 가파른 회청색 지붕이 솟아오르며, 각 지붕은 비늘 같은 흰 점으로 덮인 양파 모양 돔을 낮은 드럼 위에 얹고 있다. 칸마다 불 켜진 초를 꽂은 폴리칸딜론이 사슬에 매달려 있다. 스미르노바는 이 조명 기구들의 처음 밑그림을 식별했는데, 이는 최종 형태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 배경의 기원을 두고 여러 설명이 제시되었다. 니콜라이 보로닌과 게오르기 바그너는 여기에서 원뿔형 지붕을 얹은 러시아 목조 성당의 모습을 보았다. 스미르노바는 14세기의 예배용 이콘이 현실을 그토록 직접적으로 재현했다는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복합적인 기원을 제안했다. 첫째는 뾰족한 키보리온의 재해석으로, 라구데라의 파나기아 투 아라카 성당에 있는 〈성모 입당〉(1192)이 그 예이며, 그곳에도 등잔이 매달려 있다. 둘째는 성 니콜라오스 생애 이콘의 작은 장면들을 채우던, 정면 단면으로 그린 작은 성당들이다. 그녀에 따르면 크리보예의 이콘은 그러한 장면 하나를 독립된 작품으로 확대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셋째로, 더 멀리는 노브고로드 사람들이 성 소피아 대성당의 청동 문 같은 작품을 통해 알고 있던 로마네스크 건축 틀이 있다. 러시아적 성격은 주로 양파 모양 돔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성전을 묘사한 문헌도 있다. 포들린니키(podlinniki)라 불리는 러시아 이콘 화가용 지침서들, 그 가운데 16세기 사본으로 전하는 노브고로드 판본은 입당 장면에서 테오토코스가 세 개의 꼭대기와 다섯 단의 계단 또는 다섯 개의 기둥을 갖춘 성전의 문 앞에 서 있도록 규정한다. 또 다른 지침서는 세 개의 돔을 얹은 성전을 언급하며, 그 안에 순결하신 분이 장막 안에 있듯 앉아 있다고 적는다. 스미르노바는 더 나아가 배경의 세 요소인 성전, 문, 등잔을 니코메디아의 게오르기오스가 지었다고 전하는 축일 카논의 은유와 연결했다. 이 카논에서는 테오토코스 자신이 성전에, 문에, 그리고 주님의 집을 비추는 등잔에 비유된다.

황토색 바탕과 성전의 초록색 벽 위에는 진사로 쓴 대문자 슬라브 문자(우스타프) 명문이 펼쳐져 있다. 돔 높이에는 제목이 있고, 천사와 앉아 있는 마리아, 오른쪽 칸 옆에는 짧은 설명문이 있다. 이 명문들은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명문이 유난히 긴 점을 근거로 스미르노바는 본보기가 필사본 세밀화였으리라 추정하고, 장면에 긴 글이 곁들여진 《바실리오스 2세의 메놀로기온》을 비교 대상으로 제시했다. 라퐁텐도소뉴가 밝혔듯이 비잔티움 회화에서 이 장면에는 보통 “Τὰ Εἰσόδια τῆς Θεοτόκου”(테오토코스의 입당) 또는 더 자주 “Τὰ Ἅγια τῶν Ἁγίων”(지성소)이라는 제목이 붙는다.

나무, 색채, 얼굴

판은 거칠게 다듬어졌고 옹이가 많다. 화면은 코브체그 형태로 약간 오목하게 파였으며, 그 아래에는 천과 석고 바탕이 깔려 있다. 뒷면에는 세 조각을 고정하던 쐐기 두 개의 홈이 남아 있다. 오늘날 세 조각은 이음매가 접착되어 있고 양 끝은 쇠판으로 고정되어 있다.

진사가 압도적이다. 화가는 즈가리야와 요셉의 망토, 안나의 마포리온, 천사의 옷에 진사를 하이라이트 없이 평평하게 칠하고, 이를 하늘색과 푸른색 천, 그리고 검붉은 천과 대비시킨다. 하늘색과 푸른색 천에는 길고 흰 붓질로 하이라이트를 넣었고, 검붉은 천에서는 그 붓질이 하늘색이 된다. 스미르노바의 지적에 따르면 초록과 파랑은 묽고 잘 갈리지 않았으며 고르지 않은 층으로 칠해졌다. 후광은 붉은 윤곽선을 두른 금빛이고, 바탕과 테두리는 연한 노란색이며, 이콘 전체를 분홍과 진사 두 가지 색조로 된 넓은 띠가 둘러싸고 있다.

둥글고 고요하며 거의 윤이 나는 얼굴들은 갈색 프로플라스모스(산키르) 위에 장밋빛 황토의 작고 서로 맞물리는 붓질로 그려졌다. 흰 하이라이트는 뺨과 이마에 나란히 또는 부채꼴로 펼쳐진다. 윤곽이 뚜렷한 큰 눈과 그 아래의 그늘, 꼭 다문 입이 보인다. 표정은 인물마다 같고 흔들림이 없지만, 같은 시대의 다른 지방 이콘에서 볼 수 있는 엄격함은 없다. 작고 둥글게 휘어진 옷 주름은 몸을 제2의 피부처럼 감싼다.

전반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처녀들의 무리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오른쪽 판 이음매를 따라, 그리고 아래 테두리에는 후대의 덧칠과 보충 흔적이 남아 있다. 앞면까지 뚫고 나왔던 쐐기용 못의 큰 구멍들은 메워지고 색이 맞춰졌다. 명문은 마모되었다.

노브고로드인가, 러시아 북부인가?

이 시대 작품 가운데 연대 추정이 이토록 크게 엇갈린 예는 드물다. 베라 안토노바는 이 이콘을 13세기에, 알렉산드르 아니시모프와 이고리 그라바르는 15세기에 두었다. 알파토프는 한때는 14세기 후반 또는 말을, 또 한때는 14세기 초를 제시했으며, 라자레프와 게롤트 브즈도르노프는 14세기 전반을 제시했다. 이러한 혼란은 양식 자체로 설명된다. 작고 둥근 주름은 12세기와 13세기 초의 회화를, 인물의 양감과 색채의 강렬함은 13세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스미르노바에 따르면 인물과 회화 수단의 단순화는 이것이 옛 본보기를 간직하던 지방 환경에서 만들어진 14세기 작품임을 보여 준다.

이 이콘은 유사한 작품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별다른 유보 없이 노브고로드 작품으로 논의되었다. 일찍이 알파토프는 이 이콘이 옛 랴부신스키 컬렉션에 있다가 지금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소장된 〈성모 탄생〉과 관련이 있음을 지적했다. 두 작품은 같은 대칭 구도를 보이며, 기도하는 인물들이 아기 쪽을 향한다. 오제레보에서 온 성 니콜라오스 생애 이콘과의 유사성은 그보다 멀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유례는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을 그린 이콘 두 점, 그리고 성 보리스와 성 글레프를 그린 이콘 한 점으로, 모두 개인 소장품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얼굴 유형이나 손의 소묘에 그치지 않고 그리는 방식 자체에까지 이른다. 밝은 황토색의 길고 촘촘한 붓질, 넓은 흰 하이라이트를 넣은 같은 색조의 파랑이 그렇다. 스미르노바는 이 작품들이 모두 러시아 북부 어딘가의 같은 공방 또는 이웃한 공방들에서 나왔다고 결론지었다.

크리보예가 있는 드비나 지역은 노브고로드의 영향권에 속했지만, 볼로그다와도 이어져 있던 러시아 중부의 영향도 받았다. 볼로그다 권역에서도 노블렌스코예의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 같은 이콘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스미르노바는 이 이콘이 노브고로드만이 아니라 볼로그다의 지방 전통과도 관련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작품이 워낙 지방적이어서 그 뿌리에 대해 확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경솔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노브고로드라는 이름 옆에 물음표를 붙여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주문자 계층에 관해서는 같은 연구자가 가설이 잠정적임을 강조하면서, 도시의 상업 구역인 포사드나 작은 가부장적 마을에 가까운 취향을 상정했다.